270년 전 영조대왕의 도포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만나다

최초 일반 공개 -270년 전 영조대왕 도포

노승원 기자 | 기사입력 2010/07/27 [09:42]

270년 전 영조대왕의 도포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만나다

최초 일반 공개 -270년 전 영조대왕 도포

노승원 기자 | 입력 : 2010/07/27 [09:42]

최초 일반 공개 -270년 전 영조대왕 도포

발견된 이래 한 번도 공개 된 적 없었던 영조대왕 도포(英祖大王 道袍, 중요 민속자료 제220호)를 국립대구박물관(관장: 이내옥)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다.

다음달 15일까지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는 영조대왕의 도포가 국립대구박물관 섬유복식실에서 전시된다는 소식에 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79년, 대구 파계사 관세음보살의 복장유물로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영조대왕의 도포가 국립대구박물관의 새롭게 신설된 섬유복식실에서 그 첫 모습을 공개한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파계사에서는 영구보존을 위해 밀봉조치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사진공개 외에는 유물 공개를 하지 않았기에 이번이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영조대왕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을 개금(改金)하다가 발견되었다. 도포와 함께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이 발견되어 이 도포가 파계사에 보관된 경위가 밝혀졌다.

발원문에 따르면 건릉 5년(1740, 영조16년) 경신(庚申) 9월에 대법당을 수리하고 영조가 탱화 일천불을 희사하면서 이 곳을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도량으로 삼고 영조의 청사상의(淸沙上衣)를 복장하여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하고 있다.(문화재청 발간-문화재대관 인용) 이러한 발원문에 의해 영조대왕의 도포임을 알게 되었다.

파계사는 영조대왕의 원찰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804)때 창건되었고, 조선 영조대왕과 전생의 인연을 맺고 있는 사찰로 그 동안 파계사와 영조대왕과의 전생의 인연설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로만 구전되어 왔다. 그런데 1979년,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發願文)에 의해 파계사에 보관된 경위가 밝혀졌고 영조대왕의 원찰(願刹)이라는 구전이 입증된 것이다.

구전의 내용인 즉 조선 숙종임금이 어느 날 숭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내관을 보냈더니 마침 법명을 용피로 쓰는 한 승려가 숭례문 앞에서 쉬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영원선사(파계사 3창 주인)였다. 당시 배불정책에 의해 승려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을 때라 영원선사는 사찰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수도를 하게 해 달라고 탄원하기 위해 숙종임금을 만나러 갔고 탄원의 기회를 얻지 못하자 파계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숙종은 꿈에 나타난 스님과의 인연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태자를 얻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임금의 부탁을 받은 영원은 친분이 있던 북한산 금성암의 농상(聾上)스님과 세자잉태를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사주에는 자식이 없고, 세자가 될만 한 인물이 없었다. 영원선사는 농상에게 세자로 태어나기를 권유하였고, 농상은 무수리였던 숙빈 최 씨에게 현몽된 뒤, 세자(영조대왕)로 환생, 조선중기를 문화로 꽃피우고 파계사의 은인이 되기도 했다. 즉, 전설로 볼 때 영조대왕은 전생이 스님이요, 스님의 환생이기에 파계사와의 인연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런 전설의 배경에는 조선 왕조와 사대부들의 의식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근거로써 유학을 숭상하면서도 내적으로 불교적인 신앙을 가졌던 즉, 외유내불(外儒內佛)의 사상적 구조를 짐작케 한다.

영조대왕 도포의 복식사적 가치

불복장물(佛腹藏物)이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할 때 불상의 몸 안에 넣는 물건을 말한다. 주로 경전이나 발원문, 발원자들의 옷, 직물류 등을 넣는다. 당시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소망을 담아 복장물을 넣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종교적 의미를 뛰어넘어 당시의 사회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옷과 직물류는 상태가 양호하기 때문에 당시 옷의 색상이나 직물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92년경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지만 파계사의 영조대왕 도포는 현품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형태와 색이 거의 완전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 도포는 1740년대에 왕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도포의 형태는 넓은 두리소매에 반목판 당코깃이 달려 있다. 당시 사대부가 입었던 도포의 깃은 대부분 칼깃인데 비해 파계사 도포는 반목판 당코깃이 달린 것이 특징적이다. 따라서 목판 당코깃 옷이 궁중과 관련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도포로 인해 깃의 형태나 소매, 밑단선 등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시대가 올라가면 완만하고 좁고 긴 소매였다가 점차로 소매통이 넓은 두리소매형으로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포는 출토물이 아닌 현존물이어서 옷감의 질감과 색을 그대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복식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조대왕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정도로 가장 융성했던 때였다. 따라서 이때의 임금의 옷은 당대의 최고 걸작품이며 그 옷들 중 하나가 바로 영조대왕 도포이다.

섬유복식실 신설- 우리나라 복식의 역사를 한 눈에

4가지의 키워드(실絲, 직조織造, 색채色, 옷衣)를 통해 복식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줄 섬유복식실에서는 ‘영조대왕 도포’(중요민속자료 제220호)뿐만 아니라 ‘흥선대원군 기린흉배’(중요민속자료 제65호)와 국보로 지정된 ‘흑석사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국보 제282호)’도 함께 전시된다.

이처럼, 국립대구박물관은 귀중한 복식 유물을 통해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섬유복식 특성화 박물관으로서 앞으로도 우리가 만나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유물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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