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 보고나서 한참 뒤 ‘폭풍오열’할 ‘이방인’

유진모 | 기사입력 2017/02/19 [11:16]

‘싱글라이더’, 보고나서 한참 뒤 ‘폭풍오열’할 ‘이방인’

유진모 | 입력 : 2017/02/19 [11:16]
▲ 이하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K스타저널 유진모 칼럼] 무서운 영화가 나왔다. 아직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버금갈 만한 영화가 나왔다고 장담하기 힘든 한국 영화계에서 이만큼 철학적인 영화라면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 호러 장르가 아니다. 담고 있는 철학의 힘이 놀라워 한국영화계의 이방인'(알베르 카뮈)이라 부를 만한 싱글라이더’(이주영 감독,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

 

강재훈(이병헌)2년 전 호주로 아내 수진(공효진)과 아들 진우를 떠나보낸 40대 초반의 기러기아빠다. 증권회사 지점장까지 승승장구한 그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날 부실채권 사건으로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는다.

 

진우의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하기로 했던 수진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귀국을 일주일 미룬다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이게 의논이야? 일방적 통보지라고 뇌까린 뒤 그는 휴대전화도 내던진 채 무작정 호주로 떠난다.

 

연락도 없이 달랑 주소만 들고 가족이 사는 집을 찾은 재훈은 수진이 진우의 현지 친구 루시의 아버지 크리스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밖에서 발견하곤 선뜻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댄다.

 

저녁시각 홀로 식당에 앉은 그는 낮에 봤던 워킹홀리데이 대학생 지나(안소희)를 또 본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간 그녀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밖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난다. 재훈은 황급히 나가 그녀를 부축해 백패커의 숙소에 재워준다.

 

그녀는 지난 2년간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 19000달러를 또래의 한국인들에게 사기 당했다며 재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찾은 범인들의 텅빈 숙소에는 임대 중이란 팻말만 걸려있다.

 

재훈은 다시 수진의 집을 찾아가 먼발치서 그녀와 크리스를 훔쳐본다. 호주의 수진은 예전의 재훈의 아내가 아니라 완전히 변했다. 재훈과의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시건장치에 집착할 정도로 꼼꼼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집 뒷문은 아예 시건장치가 없었고, 귀국해서 살림에만 충실하겠다던 그녀는 호주 정착을 꿈꾸고 있었다.

 

원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매일매일 노력하는 게 귀찮다며 아끼던 바이올린을 망설임 없이 팔아치웠던 그녀는 시립교향악단 입단 오디션을 보고 있었고, 기술이민을 신청해놓은 상태.

 

이렇게 변해버린 그녀가 재훈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크리스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는 시간이 남아돌아 진우까지 돌봐줄 정도의 아주 평범한 남자. 미남도 아니고, 옷차림새도 남루한 시골뜨기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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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일용직 노동자고 그의 아내 스텔라는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돼 누워있는 상태. 그 충격으로 크리스는 아직도 운전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텔라 역시 크리스와 수진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괘념치 않는 눈치다.

 

수진의 집을 겉도는 재훈에게 “40년 간 이 동네에 살았는데 당신은 처음 본다. 저 집에 몰래 들어가 뒤지는 것도 봤다며 웬 노파가 떠나라고 경고한다. 진우가 급성장염으로 입원하자 재훈은 불가피하게 그 앞에 나타난다. 재훈은 아들, 괜찮아?”라고 말을 건네고, 진우는 아빠, 아빠 맞아?”라고 반긴다.

 

퇴원 후 진우는 수진에게 병원에서 "아빠를 봤다"고 말하고, 수진은 그럴 리 없다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지만 크리스와 사랑을 나눈 다음날 집안 공기 속에서 뭔가 느낀다.

 

수진과 진우가 아끼는 또 다른 식구는 포메라이언 종 강아지 치치다. 그런데 치치가 갑자기 재훈을 따르기 시작한다. 재훈은 그렇게 지나와 치치와 동행자가 돼 생면부지의 땅을 겉돌면서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러닝타임 중간에 채 못 이르러 눈치 빠른 관객은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전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클지 몰라도,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비교하면 그다지 큰 아픔은 아니다.

 

영화는 주체성 정체성 자존감을 묻는다. 2년간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을 사기당한 지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며 일해 (고작 요것밖에) 돈을 () 모았다. 게을러서 가난하단 말, 다 개소리라고 분노한다.

 

수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재훈을 사랑했고, 진우를 끔찍이도 아꼈으며, 그들과의 가족관계가 최고로 소중하다 느껴 그것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가정을 꾸린 게 최상의 행복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만리타국에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나는 왜,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은 뭔가’ ‘도대체 내 인생은 뭔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서서히 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은 그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수진과 크리스의 관계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불륜이라는 천박한 세속적 잣대로만 볼 수 없다. 재훈에 비해 크리스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남자다. 쉽게 말해 재훈은 성공한 화이트컬러고, 크리스는 가난한 블루컬러다. 게다가 크리스는 교통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겁쟁이고, 산송장과 다름없는 아내를 돌봐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러나 크리스는 긍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즐겼고 또 행복을 추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에 대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되 비현실적인 아내와의 부부관계에 괴로워하거나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수진과의 우정을 쌓아가며, 그게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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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은 그리스신화의 벨레로폰테스(벨레로폰). 사실 포세이돈의 아들인 그는 젊은 시절 실수로 친형제를 죽인 업보로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맞지만 페가수스를 얻음으로써 키마이라를 죽이는 등 맹활약을 펼쳐 헤라클레스 이전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자만이 지나쳐 오만방자해진 그는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포스까지 날아오르려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절름발이에 장님이 돼 방황하다 처참하게 죽는다.

 

증권가의 기린아로 승승장구하던 재훈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지만 오직 실적에 눈이 멀어 자신조차도 믿지 않았던 부실채권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수조 원의 손해를 끼친다. 과욕과 자만이 하루아침에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제우스를 분노하게 만든 벨레로폰테스다. 제우스는 곧 신뢰다.

 

제우스에게 버림받은 벨레로폰테스는 앞을 못 보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엘레이안 평야를 방황했다. 재훈이 수진과 진우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숨어서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것과 똑같다.

 

외형상 주인공은 세 명이지만 사실은 데뷔하는 이 감독의 시나리오와 이병헌의 투톱체제다. 반전은 새롭진 않다. 다만 그 방식이 기존의 화법과 달라 울림이 크고 여운이 길다. 뭣보다 그 시나리오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이병헌의 연기력이다.

 

재훈의 대사는 철저하게 절제돼있다. ‘남편이라고 말 못 하고, 아버지라고 나설 수 없는재훈의 말이 많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제 할리우드 스타로서 능숙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면서도 일부러 발음을 한국식으로 고칠 만큼 디테일에서 완벽에 가까워진 이병헌의 연기 필살기가 관객의 가슴에 큰 납덩이 하나를 매단다.

 

영화가 노래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고독, 즉 쓸쓸한 인생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과 행복은 부풀려진 계산서일 뿐 삶의 실상이란 살고나면 그저 적자가계부일 뿐이라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물론 대중은 이런 메시지를 진작부터 알고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최희준의 히트곡 하숙생이다.

 

호화저택에서 살며 부귀영화를 누리지만-혹은 그걸 위해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에 희망을 걸고 웃지만-사실 죽고 나면 모든 게 허망할 뿐 세상은 하숙집이고, 모든 사람은 하숙생이란 철학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비행기에 각자 한 명씩 승차(싱글라이더)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무위자연(순리대로 살자)이 주제다.

 

최루성 영화라면 관람 중 감정이입하는 게 일반적이다. 시퀀스가 만든 설정이나 주인공의 상황 등에 몰두하고 동화돼 콧등이 시큰해지기 마련. 그러나 싱글라이더는 관람 중에는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지는 매우 특이한 영화다. 97. 15세 이상 관람 가. 222일 개봉.

 

유진모/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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